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는 단순한 가곡을 넘어섭니다. 그 안에는 고독한 영혼이 도시의 한기와 삶의 절망 속을 걸어가는 내면의 여정이 펼쳐집니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이라는 도시적 배경과 낭만주의 시대의 정서, 그리고 작곡가 자신의 감정 세계가 어떻게 이 곡에 녹아들었는지를 살펴보며, 도시와 음악, 인간 감정의 관계를 조명해 봅니다.
19세기 빈, 낭만적 고독이 흐르던 도시
프란츠 슈베르트가 활동하던 시기, 즉 19세기 초반의 오스트리아 빈은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전주의 음악은 낭만주의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도시 빈은 그 흐름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빈은 화려한 음악회와 살롱 문화가 활발했지만, 동시에 산업화와 정치적 억압, 예술가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공존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빈에서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시달렸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가난과 질병 속에서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쓸쓸한 정서는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빈이라는 도시의 풍경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의 감정—쓸쓸함, 방황, 절망, 그리고 무표정한 도시의 침묵—은 분명히 느껴집니다. 즉, 이 곡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정신적 겨울’을 노래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사 속 겨울 풍경. 도시의 상징과 인간의 절망
겨울 나그네의 가사는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의 시집을 바탕으로 하며, 총 24곡으로 구성된 연작입니다. 이 시들은 이름 없는 방랑자가 연인의 집을 떠나 겨울의 풍경 속을 외롭게 떠돌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눈, 바람, 까마귀, 얼음, 묘지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정서적 배경이기도 합니다. ‘도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연인의 집, 문간, 거리, 묘지 같은 요소는 모두 도시적 공간을 상기시키며, 인간관계 속에서 밀려나는 한 인물의 정서를 강조합니다. “이방인은 도시의 문을 나서며, 더 이상 돌아갈 집이 없다”는 시구는 단순한 사랑의 이별을 넘어, 사회적 단절과 소속감의 상실을 말합니다. 슈베르트는 이러한 시적 정서를 음형과 조성, 리듬의 반복 등을 통해 고스란히 음악으로 구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첫 곡인 Gute Nacht에서는 반복되는 낮은 리듬과 단조 조성이 도시의 차가운 거리와 인간의 절망을 겹쳐 표현하고, 마지막 곡인 Der Leiermann에서는 거리의 음유시인이 등장해 예술가의 쓸쓸한 운명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겨울 나그네는 단지 자연 속의 방랑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도시 속에서 살아가던 예술가와 개인들의 정신적 고독을 반영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시 정서와 예술가의 실존적 고통
슈베르트는 생전 한 번도 널리 인정받는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베토벤처럼 유럽 전역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고, 그의 음악은 소규모 살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공유되던 ‘친밀한 예술’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늘 건강이 나빴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예술성과 세상의 인정 사이에서 깊은 괴리를 느꼈습니다. 이러한 내면은 겨울 나그네의 모든 곡에 자연스럽게 투영됩니다. 특히 마지막 곡 Der Leiermann에서는 “거리의 끝에 서서 오르간을 돌리는 늙은 음유시인”이 등장하며, 이는 많은 해석에서 슈베르트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절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해됩니다. 도시의 거리에서 고립된 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리를 반복하며 걷는 존재—이 이미지야말로 당시 빈에서 슈베르트가 느꼈던 예술가의 실존적 고통이자, 오늘날 우리가 도시에서 느끼는 익명성과 외로움의 감정과도 닿아 있습니다. 빈이라는 공간은 단지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겨울 나그네라는 작품 속에서 정서적 풍경으로 기능합니다. 바쁜 도시의 거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의미 없이 반복되는 하루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점점 지워지는 감정—슈베르트는 그것을 음악으로 정제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방랑자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19세기 빈이라는 도시가 가진 정서, 그리고 그 안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한 예술가의 내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슈베르트는 도시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거리의 한기와 군중 속 고독을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 감정에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곡을 다시 들을 때는, ‘겨울’이라는 계절 너머에 있는 인간의 정서와 도시의 무채색 풍경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겨울 나그네>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노래입니다.